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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 소설 단편 - 가을 <3>

리바진스 (levianwjns) 2024. 10. 12. 08:04

한동안 산 정상은 생기 없는 가을 태양과 그걸 숨기려는 듯, 구름 들로 어지럽게 어두웠다가 밝아졌다가를 반복했습니다.

개강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봄의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서 리포트를 작성하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모를 키가 큰 과 동기가 옆자리 의자를 한 손으로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인사하듯 휘휘 젓더니 의자를 당겨 앉았습니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고, 옆에는 아이패드를 꺼내서는 금세 나와 같을 것이라 짐작되는 리포트를 작성했습니다.
책을 뒤적거려 포스트잇으로 표시하고, 볼펜으로 줄을 긋고, 출력한 자료를 옮겨 타이핑하기를 반복해 리포트를 절반쯤 해가고 있을 때 무심히 옆을 봤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내 노트북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아이패드를 쓱 밀어주고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멀리 보이는 친구에게 성큼 걸어 나갔습니다.

뭐든 잘하는 거 같았습니다.
가방 가득 이것저것 넣어 가지고 다니는 나와 달리 IT 기기에 꽤 능숙하고, 과 동기들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은 거 같고, 캠퍼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걸 즐기는 거 같기도 하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수업에 자주 빠져서 성적은 별로였는데, 학교 신문사 기자로 일하느라 그랬다고.

며칠 뒤 수업에 들어가려 바삐 걷던 내 앞에서 스마트폰 메시지를 확인하느라 멈춰 선 그 친구의 그림자와의 거리가 급하게 좁혀졌습니다.
내 그림자가 위아래 좌우로 마구 흔들렸고, 딛고 서있는 길마저 잦은 진동을 보내 떨림은 멈출 기미가 없었습니다.
거친 숨소리를 숨기느라 계속 헛기침을 하며, 가까스로 몇 발자국 떨어진 자판기를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내 손가락 끝과 자판기가 하나로 연결되고, 서로의 그림자들이 먼저 인사를 나눈 뒤 몇 발자국 떨어진 자판기 앞에 섰습니다.
자판기가 동전들을 삼키고 내뱉은 캔 커피의 첫 모금은 아무 맛도 나지 않았지만, 숨을 참고 간신히 전한 첫마디 뒤에야 커피 맛이 조금 느껴졌습니다.
오늘 제출해야 하는 리포트나 다른 수업 이야기까지 다행히 끊이지 않은 대화 덕분에 커피 맛은 조금 더 진해졌고, 마지막 한 모금이 남았을 때는 달콤해졌습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커피가 다 사라지기 전 거의 빈 커피 캔을 흔들어 보이며, 웃어 보였습니다.

그 순간 수업을 듣기 위해 하나 둘 모인 사람들로, 세상은 팽팽하게 줄을 당겨 얽히고설킨 공간이 된 것만 같았습니다.

그 사이 친구의 그림자로부터의 떨림이 제게 전해졌고, 거의 다 마신 캔 커피를 흔들어 보이며, 제게 웃음 지었습니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지만 문과 벽을 관통해서 내 시선에는 남자 친구가 계속 존재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봄의 감정들이 싹트고, 마음속에서는 분홍 철쭉이 남 모르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