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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 소설 단편 - 가을 <2>

리바진스 (levianwjns) 2024. 9. 27. 08:22

산에 얼마간 오르자 하늘이 열리고, 시야가 트이며, 회색 도시 뒤로 번져 오르는 가을 단풍이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뺏긴 뒤, 옆에서 멍청하게 웃고 있는 남자 친구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습니다.

올라오는 동안에도 분명 봤겠지만, 내게 오는 것을 거부했거나 내가 거부했을 나무들의 변화를 이제야 알아차렸습니다.
그늘에 가려 빛이 닿거나 닿지 않거나, 키가 크거나 작거나, 왼쪽으로 굽거나 오른쪽으로 굽거나, 회색빛 건물에 가려지거나 가려지지 않거나.
지나는 구름의 그림자도 어떤 나무에는 닿거나 닿지 않거나, 등산로 굽이 굽이에 밟히거나 밟히지 않거나, 도시가 내뿜는 공해에 아프거나 아프지 않거나.

저마다의 이유들로 어떤 나무는 여름빛의 초록을 그대로 지니고 있고, 어떤 나무는 가을빛의 붉음을 새롭게 머금고 있고, 어떤 나무는 어느새 겨울빛의 갈색을 어렵게 붙잡고 있었습니다.
가을빛은 그렇게 시간을 타고 여기저기로 번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가을 풍경이 부른 평온함과 고요함, 거친 숨이 담긴 목소리 뒤로 미적지근해졌을 생수병 물이 모습을 감추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내 귀에 전해졌습니다.

집에서 전철역으로 두 정거장이면 올 수 있는 곳, 지나가면서 보면 산 정상이 짐작되는 곳,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건 내 크나큰 실수였습니다.
도무지 운동이라는 걸 하기 싫어했고, 마른 체형이고, 체력도 좋지 않아, 하루를 마치고 집에 가면 피곤함에 일찍 잠들기 일쑤인 내게 산은 무리였습니다.

새 신발이나 다름없는 운동화, 얼마 전 새로 산 운동복 상하의, 500ml 생수병으로는 산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한 시간 남짓의 산행에 나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어지럽고, 매스껍고, 세상이 노랬습니다.
남은 힘을 모아 부글부글 끓는 원망과 짜증과 불쾌감 등 온갖 감정들을 눈에 끌어모아 남자 친구를 노려봤습니다.

우리가 올라선 작은 산과 저 멀리 도시 끝을 향한 듯한 남자친구의 시선 사이에 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움트고, 마음속에서는 거친 가시덩굴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