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프롤로그>
지금은 앨범을 뒤적여 다른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그 사람 손에 이끌려 그곳에 갔을 때 제 발걸음은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다리는 아프고, 땀은 흐르고, 들고 있던 물은 금새 사라져 갔습니다.
한 시간 남짓 시간이 지나 저는 엉망잔칭이 되어버리고, 어지럽고, 매스껍고, 세상이 노랬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시야가 트이며, 회색 도시 뒤로 번져 오르는 가을 단풍이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뺏긴 뒤, 옆에서 멍청하게 웃고 있는 남자 친구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씨를 뿌리는 바람에, 그 해 겨울이 지나고 다시 찾아온 이듬해 가을 이별은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이별한 후 마음 한 구석에 쌓인 원망하는 감정은 사귄 시간만큼이 지나서야 진정이 될 만큼 저를 괴롭혔죠.
그런데 요즘 친구들은 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너 설마? 설마?
그 산은 작디작은 도심 한가운데 있는 볼품없고, 이름도 별로고, 예쁘지도 않은 산이죠.
토요일 아침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저는 그 산 정상에 오릅니다.
DJ MJ님도 설마? 설마?
남자 친구가 그리워서, 혹시 남자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해서…
아닙니다.
제가 어려서요.
감정은 거의 지워졌어요, 산에 잘 묻은 것만 같아요.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기 전, 저는 어리지 않았으면 해요.
지난해 가을 산 정상, 옆에 선 나무에 묶어 둔 빛바랜 리본이.
지난해 가을 산 중턱, 돌 더미 속에 숨은 제 희망 담긴 돌멩이가.
지난해 가을 산 입구, 외롭게 서 있는 안내 표지판이.
제게 어리지 않다고,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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