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9

창작 : 소설 단편 - 가을 <3>

한동안 산 정상은 생기 없는 가을 태양과 그걸 숨기려는 듯, 구름 들로 어지럽게 어두웠다가 밝아졌다가를 반복했습니다. 개강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봄의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서 리포트를 작성하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모를 키가 큰 과 동기가 옆자리 의자를 한 손으로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인사하듯 휘휘 젓더니 의자를 당겨 앉았습니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고, 옆에는 아이패드를 꺼내서는 금세 나와 같을 것이라 짐작되는 리포트를 작성했습니다. 책을 뒤적거려 포스트잇으로 표시하고, 볼펜으로 줄을 긋고, 출력한 자료를 옮겨 타이핑하기를 반복해 리포트를 절반쯤 해가고 있을 때 무심히 옆을 봤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내 노트북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아이패드를 쓱 밀어..

텍스트 (Text) 2024.10.12

시 : 사람, 소슬바람, 여름의 흔적

고장 나고 부서지고. 자고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음속에 있는 사람을 꼭 붙잡는 일부터. 찡긋. 소슬바람 : 으스스하고 쓸쓸하게 부는 가을바람. 좀처럼 쉬운 건 아니지만 사람을 피해 단 1분만. 찰랑. 10월, 가을이 되었는데 여전히 여름의 흔적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 잠시 가을에 머물러야겠네요. 초롱.

텍스트 (Text) 2024.10.05

창작 : 소설 단편 - 가을 <2>

산에 얼마간 오르자 하늘이 열리고, 시야가 트이며, 회색 도시 뒤로 번져 오르는 가을 단풍이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뺏긴 뒤, 옆에서 멍청하게 웃고 있는 남자 친구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습니다. 올라오는 동안에도 분명 봤겠지만, 내게 오는 것을 거부했거나 내가 거부했을 나무들의 변화를 이제야 알아차렸습니다. 그늘에 가려 빛이 닿거나 닿지 않거나, 키가 크거나 작거나, 왼쪽으로 굽거나 오른쪽으로 굽거나, 회색빛 건물에 가려지거나 가려지지 않거나. 지나는 구름의 그림자도 어떤 나무에는 닿거나 닿지 않거나, 등산로 굽이 굽이에 밟히거나 밟히지 않거나, 도시가 내뿜는 공해에 아프거나 아프지 않거나. 저마다의 이유들로 어떤 나무는 여름빛의 초록을 그대로 지니고 있고, 어떤 나무는 가을빛의 붉음을 새롭게 머금고 있고,..

텍스트 (Text) 2024.09.27

창작 : 소설 단편 - 가을 <선택>

가을 같은 수업을 듣느라 서로 알고 지내다가,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말을 나눈 뒤 자연스레 친해진 남학생이 있었습니다. 가방 가득 이것저것 넣어 가지고 다니며 수업을 수강하느라 바쁜 나와 달리, 그는 IT 기기에 꽤 능숙하고, 과 동기들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은 거 같고, 캠퍼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걸 즐기는 거 같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수업에 자주 빠져서 성적은 별로였는데, 학교 신문사 기자로 일하느라 그랬다고. 수업에 들어가려 바삐 걷던 어느 날 내 앞에서 스마트폰 메시지를 확인하느라 멈춰 선 그 친구와의 거리가 급하게 좁혀졌습니다. 내 그림자가 위아래 좌우로 마구 흔들렸고, 딛고 서있는 길마저 잦은 진동을 보내 떨림은 멈출 기미가 없었습니다.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거친 숨소리를 숨기느..

텍스트 (Text) 2024.09.14

창작 : 소설 단편 - 가을 <프롤로그>

가을 지금은 앨범을 뒤적여 다른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그 사람 손에 이끌려 그곳에 갔을 때 제 발걸음은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다리는 아프고, 땀은 흐르고, 들고 있던 물은 금새 사라져 갔습니다. 한 시간 남짓 시간이 지나 저는 엉망잔칭이 되어버리고, 어지럽고, 매스껍고, 세상이 노랬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시야가 트이며, 회색 도시 뒤로 번져 오르는 가을 단풍이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뺏긴 뒤, 옆에서 멍청하게 웃고 있는 남자 친구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씨를 뿌리는 바람에, 그 해 겨울이 지나고 다시 찾아온 이듬해 가을 이별은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이별한 후 마음 한 구석에 쌓인 원망하는 감정은 사귄 시간만큼이 지나서야..

텍스트 (Text) 2024.09.09